뮤지컬 영웅 Ms Lonely



뮤지컬 영웅

12월 24일 8시
정성화/이희정/이상은/소냐 공연.

1. <나의 지금까지 뮤지컬 관람기>
세번째 보는 뮤지컬이다.

첫번째는 아마도 <아이 러브 유> 였던 것 같다. 그냥 그랬다.
뮤지컬은 연극보다 더 연극적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난다.

두번째는 아마도 <헤드윅>이었다. 소극장에서 한 록 뮤지컬.
주인공 역의 배우는 김수용이었다. 이건 확실히 기억난다.
왜냐면, 그 배우의 노래 가사를 (그러니까 뮤지컬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번째가 이 공연, <영웅>이다.
하도 칭찬 일색의 평가만 있었고,
무대에 실제 기차 객차 두 량이 등장한다는데 도대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였고,
크리스마스 이브, 부모님이 보시고 좋아할 만한 뮤지컬로 동료가 <오페라의 유령> 보다
더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다.

감상의 결론은.. 나로서는 맨숭맨숭.
뮤지컬이란 장르는 나랑은 별로 맞지 않나 보다 하는 생각.
왜냐면, 정말 칭찬 일색인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2. <영웅>이라는 뮤지컬, 특히 12/24일 공연을 보고 난 후, 공연에 국한된 감상.
첫번째는 정말 길게 느껴진다는 것.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이로부미를 암살(사살)하였다.
라는 한줄짜리 역사적 팩트로부터 지어졌을 두시간 이상의 긴 러닝타임 내내,
특히 1부 내내 별 사건이 없다.
어떤 작품 (소설이건 영화건 연극이건 간에)을 대할 때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면서
작품을 이해하는 나에게는 맘둘 곳이 없었다.
게다가 내 앞자리에 앉은 남자는 1부 전반 중반까지는 옆자리의 여자와 계속 소곤대더니
2부 후반 중반부터 끝날 때까지 졸면서 계속 머리를 끄덕여 대서 어찌나 신경에 거슬리던지,
차라리 "졸지 마시고 주무세요"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짱짱한 노래들과 이따금 총소리에도 잘 수 있다니.. 신기한 면도 있었지만.

보이는 무대 자체는 훌륭하였다.
옆으로 움직이는 간이벽들을, 앞 뒤 여러층으로 배치하여
이 벽들을 여러 조합으로 이동하고, 또 옆면까지 영상을 비춰 깊은 거리감까지 표현한 무대.
특히 독립군과 일본군의 쫓고 쫓기는 장면은 관객들도 함께 쫓기거나 쫓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한 것 같은 착시를 주었다.
그리고 최고의 장면인 안중근의 재판 장면 ("누가 죄인인가?")도 가슴을 뜯는 어떤 절절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장면 장면 사이의 연결 고리는? 전체 장면이 모여서 만든 이야기는?-- 글쎄.

명백히 눈에 거슬리는 막도 있다.
설희(이상은 분)가 게이샤가 되어 춤을 추며 이토 히로부미에게 접근하는 장면.
정말 앞에서 이미 여섯 명의 게이샤들의 춤을 본 관객에게,
설희의 춤이 경국지색의 빼어난 춤이었다고? 전우치로 변신한 빗자루도 그것보단 나긋하겠다..
그 모습을 보고 이토가 반한다고? 믿을 수 없는, 믿어지지 않는 설정이다.
두번째로 거슬리는 장면은 믿어지지 않는 링링(소냐 분)의 나이 열 여섯.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연기가 좋아도, 기본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열 여섯.

어쩌면 무대에 너무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이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나오면서 몇몇 사람들의 (주로 어린 친구들) "짱 좋아" 연발하는 것을 듣자니,
그냥 나는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뮤지컬'이란 장르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

3. <이토는 사랑하는 조국 일본의 번영을 위해/ 안중근은 사랑하는 조국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에 실패해서 이토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하는 가정으로부터 생기는 대체 역사 소설인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 속의 이토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런 인물을 암살한 안중근은 그들의 역사에선 분명 테러리스트/암살자이다.
그리고 이토는 아마 테러리스트에게 안타깝게 당한, 살았더라면 일본을 위한 더 많은 일을 했을 위인 쯤?
물론 우리 한국인에게 이토/이등박문은 약탈자 대장이고,
안중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영웅이다.

이런 평가는 당연히 평가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상황을 벗어난 절대적인 또는 객관적인 평가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이등이 나쁜 넘인 것이고,
다음 세상에 일본인으로 태어난다면 테러리스트 안중근을 영웅으로 그린 뮤지컬이 한국에서 공연되고 있다는 소식을 해외토픽쯤에서 읽으면 한국인의 야만성?에 대해 혀를 찰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이런 예는 비일비재하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컬럼부스나, 캡틴 쿡이나,
어쩌면 현대의 넬슨 만델라나 달라이 라마도,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천주에게 누군가를 죽이는데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는 안중근을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구약의 야훼는 잘못을 삼사대에 걸쳐 벌주시는 분이지만,
 신약의 예수는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는 분이기에
누군가를, 그 누군가가 누가 봐도 나쁜 넘이라고 해도, 죽이는 데 성공하도록 해달라는 기도가 과연 성립할 수 있을까.
그저 스쳐가는 상념에 불과했겠지만, 이런 생각을 자각하는 순간 좀 무서웠다..

집에 가야겠다.
반쪽 자리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피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