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Ms Lonely

제인 에어 1제인 에어 1 - 10점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민음사

제인 에어.
20년 만에 다시 읽나?
아니, 20년 전에는 아마 계림 문고판으로 읽었을 것이고, 충실한 완역본으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년 전 문고판으로 읽었어도, 제인 에어를 만난 이후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완벽한이 아니고) 인간형 1번은 언제나 제인 에어였다. 소녀 시절, 내 몫의 인생길에 아직 내몰리지 않았을 때 만났던 제인 에어에게서 내가 샀던 것이 '로맨스'가 아니라 (나는 제인 에어도, 에드워드 로체스터도 그리 아름답지 않게 묘사되는 것에 언제나 약간은 화가 나는 편이다.) 어떤 '인간형'이었다는 것이, 지금 오직 내 몫의 삶의 길에서 휘청대면서 생각해 보면,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 때 삶에 대해 무엇을 알았다고. 그 때 그냥 어린 아이였을 때 제인 에어를 그냥 로맨스 소설로 읽었어도 충분히 즐거웠을 텐데. 거기다 문고판이었고 말이다 (아마 아동을 대상으로 한 문고판 소설이어서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심각한 라인은 많이 잘린 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마음 속에 1번 소설로 꼽고 있으면서도 20년 동안 제대로 된 완역본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은, 첫 독서의 느낌이 이렇게 오롯한 한, 다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오만이기도 했고, 또 첫 독서의 느낌이 훼손될 것을 두려워하는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특히 어렸을 때 처음 만났던 작품일수록 더 그런 것 같다. 내가 멋모를 때 읽어서/보아서 좋았던 거야, 하고 실망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20년만에 읽게 되었느냐고?
존 어빙의 <사이더 하우스> 때문이다. 존 어빙의 <가아프가 본 세상>을 읽고 그에게 흥미를 느껴 <사이더 하우스>와 <일년 동안의 과부>까지 사다놓고 일단 <사이더 하우스>부터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존 어빙에 대해서도 써놓고 싶지만, 아무튼 존 어빙도 입담이 대단한 사람이다. 너무 기묘해서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 꼭 불가능하지는 않은 이야기를 전혀 과장하는 투 없이 시침 뚝 떼고 뚝심있게 밀어 붙여 독자 앞에 만화경으로 보여 주는 작가랄까. 아무튼, 그 <사이더 하우스>에 남자 고아들에게는 남자 고아의 이야기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여자 고아들에게는 여자 고아의 이야기인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읽어 주는데, 남자 주인공인 호머 웰즈는 주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인생의 지침처럼 되풀이 해서 읽고 (무슨 실제적인 지침을 얻는 건 없는 것 같은데), 여자 주인공 중 하나인 멜로니는 <제인 에어>를 되풀이 해서 읽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이더 하우스>를 잠시 덮어두고 알라딘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부터 검색했는데, 아쉽게도 믿을 만한 번역본은 모두 절판된 것 같았고, <제인 에어>는 몇년 전 민음사에서 새번역이 나온 직후부터 나의 알라딘 보관함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에 일단 구입하게 되었다. (디킨스에 대해서는, 대신 또 다른 고아의 이야기인 <위대한 유산>을 샀다. 고아 이야기가 아니던가?)

자, 여기까지가 어떻게 20년 만에 제인 에어를 다시 만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는 <사이더 하우스>를 잠깐 밀쳐두고 <제인 에어>를 펼쳤다.
양이 상당하여 (내 마음은 한꺼번에 읽고 있는 여러 가지 소설들과 뱀파이어와 그만 두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여러 가지 신변의 잡다한 일 때문에 어지럽고 바빴다) 처음부터 읽을 엄두는 못내고 이 페이지 저 페이지 들춰 보다가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인 로체스터씨가 제인 에어에게 처음 청혼하는 과수원 장면 (23장이었다)과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돌아와 종일 방에서 자다가 깬 제인이 휘청거리며 방문을 나설 때 방문 앞에 의자를 두고 하루 종일 제인을 기다리던 로체스터씨가 쓰러지려는 제인을 받아 안는 장면 (27장이었다)을 읽었다. 번역은 어쩐지 구운몽 같은 우리 고전 소설을 읽는 것처럼 어감이 무겁고 진지하게 느껴졌다. (작품 해설에 번역자의 변에 보면 150년 전 글이라 옛글의 맛을 살리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곧 그에 빠져 버렸고, 그것은 제인의 단단하고 진지하기만 한 심지와 꼭 맞는 말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문장도 묘하게 책의 번역투와 닮아 간다.ㅋ). 그리고 제인에게 휘감겨 주말 동안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오직 제인 에어만 생각하면서 읽어 내렸다..

제인 에어는, 역시 제인 에어였다. 내가 소녀 시절에 내 안에 잡았던 제인 에어보다 더 크면 컸지, 전혀 훼손되지 않는 감동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제인 에어였다. 간단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하고 , 처음 대하는 것들에 주눅들지 않(으려 노력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날카로운 관찰력과 직관력, 그리고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의지. 정말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완벽한이 아닌) 인간형. 21세기에도 이렇게까지 단단하고 충실한 여성상을 그려내기 어려운데, 150년전 시골 목사관에서 자라 별 경험도 없는 샬럿 브론테는 어떻게 이런 여자를 그렸는지 (하긴, 피상적으로 알려진 작가의 삶으로부터 나온 가장 불가해한 인물로는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히스클리프가 한 수 위일 수도 있지). 이 제인 에어는 20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게으른 자기 성찰로 내 몫의 삶의 길 위에서 휘청대고 있는 나를 한방 먹이고,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제인 에어는 어쩔 수 없이 낭만적인 연애 소설이다. 어쩔 수 없이, 라는 말이 한계가 있는, 이라는 뜻은 아니다.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은 주로 뜨겁고 날카로운 대화로 표현되고, 그것은 정말 내 기억이 감당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생생하고 사실 이상의 진실한 무엇이었다. 정말 이 제인 에어의, 그리고 에드워드 로체스터의 사랑에 비하면 트와일라잇은 어린애가 발로 그린 낙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뭐.. 내 머릿속에는 아직 영화의 더듬더듬 "I.. feel.. very.. protective.. of you"하고 말하던 또다른 에드워드인 뱀파이어가 로버트 패틴슨의 얼굴을 하고 떠돌아다니고 있지만 말이다, 스테프니 메이어의 소설이 제인 에어에 비하면 어린애 발장난이란 건, 작가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걸?)

다만 마음이 찌릿할 정도로 아픈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혼이 성립되지 못한 밤 자신의 비통하고 비참한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신은 결혼한 적이 없는 것이며, 자신의 신부는 제인 에어 뿐이고, 자신의 비참한 영혼을 받아들여 함께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에드워드 로체스터를 거절하는 제인이었다. 20년전 그냥 물 흘리듯 읽었을 때는 그저 와 제인 정말 엄격하고 용감하구나 나라면 그냥 주저 앉았을 텐데,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팠다. 제인의 거절이. 제인을 만나기 전에 로체스터도 그저 제도와 운명의 희생물이었다. 영국 국교회가 있었는데 로체스터가 이혼을 못한 것은 그의 아내가 너무 빨리 미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제인을 만나고 제인을 잡으려고 하였을 때, 로체스터는 자신의 운명, 제도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그 시대에 종교의 영향이란게 공기처럼 근본적이고 막강하였을 것이기에, 종교법이라는 제도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주장하는 그의 모습은 제인 에어의 의지만큼이나 아프고 굳센 것이었지만, 제인 에어는 포기할 수 없는 대전제, 죽은 뒤 모든 영혼이 평등하게 설 수밖에 없는 신의 발 아래에서까지는 자신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시대의 한계였던 걸까? 제인이 그를 사랑한다면, 나중에 그에게 버림받고, 그와의 추억이 다른 정부와의 기억처럼 모욕당할 가능성이 있고, 세상과 교회로부터 비웃음과 파문을 당한다고 해도, 지금 부서지기 직전의 "그의 깊은 사랑, 그의 미칠 듯한 슬픔, 그의 광포한 기도"와 함께하는 사랑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것도 어쩌면 자기 희생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런 로체스터를 제인이 떠났기 때문에 제인 에어가 그저 낭만적인 연애 소설일 수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제인 에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였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는 자신을 녹이고 부수어 그의 빛을 돋우는 촛불이나 인어공주 같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제인 에어는 자기의 마음과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스스로 선택하여 온전한 사랑을 주었으나, 사랑의 전제 조건이었던 자신이 깨진다면 사실은 사랑도 없는 것임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평범한 격언. 제인 에어가 운명에 치이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보여준 것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인 에어가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혹은 제인 에어는 에드워드 로체스터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어떤 정도인지 몰랐거나.

아무튼 이 처녀작가의 심장은 어찌나 강단있는지 자기 남자 주인공을 장님에 외팔이로 만들고서야 여주인공에게로 돌려보낸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그야말로 미명 아래 말이다. 정말 무서운 샬럿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또 나를 오해하고 있어. 내가 그녀를 미워하는 것은 그녀가 미쳤기 때문이 아니오. 만약에 당신이 미쳤다면, 내가 당신을 미워하리라 생각하오?"
"그러시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소. 나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르고,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어떤 정도인지도 알지 못하는 거요.." – 127쪽


후. 이렇게 제인 에어를 읽었는데, 내가 다른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아니, 연애가 문제가 아니지. 난 제인처럼, 아니 제인의 반만큼이라도 정신 좀 차리고 삶에 바짝 붙어야 해.

내친 김에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도 주문했다..
http://meesum.egloos.com2008-12-28T13:23:120.31010